죄에 대한 질문들


죄는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질문: 죄는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대답:
죄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며 (요한일서 3:4)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말합니다 (신명기 9:7; 여호수아 1:18). 죄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인 천사 루시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루시퍼는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천사였습니다. 그러나 루시퍼는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가장 높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야 14:12-15). 사탄으로 다시 이름 지어진 루시퍼는 에덴 동산에 있는 인류에게 죄를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서 아담과 이브는 루시퍼가 받은 같은 유혹 즉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라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창세기 3장은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과 그의 명령에 대한 반역을 묘사합니다. 그 이후로 죄는 인류의 모든 세대를 통하여 전달되었고 우리는 아담의 자손으로서 그에게 이 죄를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12을 보면 아담을 통하여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으며 죽음이 모든 자에게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죄의 삯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23).

아담을 통해 죄를 범하기 쉬운 죄성이 인간 내면에 침투됐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의 내적인 속성은 반항죄로 이미 변하였고 이것이 그에게 영적인 죽음과 부패를 가져다 주었으며 그의 모든 후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의 외모를 닮은 것처럼 아담으로부터 죄성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다윗 왕은 이렇게 타락한 인간을 두고 한탄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5).

또 전가죄를 들 수 있습니다. 부정하다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금전과 율법문제를 다루는 데 쓰여왔던 말로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자기의 소유로 부당하게 돌릴 때 사용되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인간은 아담에게 물려 받은 죄성 때문에 죄인이었지만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주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진 후에는 모든 죄가 율법에 위배되어 인간의 책임으로 돌려지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13). 사실 불법에 대한 책임이 사람에게 주어지기 전에도 죄에 대한 궁극적인 죄값 즉 죽음이 계속 이 세상을 통치했습니다 (로마서 5:14).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는 죽음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된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없었던 모세의 율법을 범한 죄된 행위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물려받은 죄성 때문이었습니다. 즉 모세의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는 인간은 죽음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이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와 하나님의 법을 범한 불법 모두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죄의 책임은 어디로든지 속해야 되는 전가되는 죄의 속성을 인간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셨는데, 즉 죄의 값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시고 그분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죄의 삯을 갚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전가시킴으로, 죄인도 아니었던 예수님을 마치 죄인인 것처럼 대하시고 이런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대신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죄는 예수님께 옮겨진 각 사람이 지은 죄이지 아담으로 온 죄성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죄의 대가를 짊어 지으셨으나 그는 단 한번도 죄인인적이 없으십니다. 그의 진실하고 온전한 본성은 죄에 영향을 받은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로 죄인처럼 취급 받았지만 그 분은 아무런 죄도 지은 적이 없으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자들에게 전가시키고 우리 구좌를 그리스도의 의의 구좌로 이체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좌로 이체시키신 것처럼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5:21).

세 번째 형태의 죄는 개인적인 죄로 모든 사람이 매일 짓는 죄를 말합니다. 우리는 죄성을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에 작게 보이는 죄부터 살인하는 죄까지 짓고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자들은 이런 개인적인 죄 값을 포함해서 물려받은 아담의 죄 모두 스스로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런 영원한 죄의 값(지옥과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풀려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죄를 범할지 범하지 않을지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죄를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죄를 범하려 할 때 죄를 가르쳐 주시고 성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로마서 8:9-11). 일단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가운데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우리는 모두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 모세의 율법으로 드러난 죄 (전가된 죄) 그리고 개인적으로 매일 짓는 죄로 인해 처벌받습니다. 이 모든 죄의 결과는 (로마서 6:23) 육신의 죽음이 아닌 영적인 죽음입니다. (요한계시록 20:11-15) 이 모든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게” (에베소서 1:7)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질문: 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대답:
이 질문은 두 가지 문제를 다룹니다. 첫째, 성경이 특별히 죄로 지목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잠언 6:16-19; 갈라디아서 5:19-21; 고린도전서 6:9-10에 있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죄악된 행동들 즉 살인, 간음, 거짓말, 도적질 등을 명백히 언급하며 죄라고 합니다. 둘째, 그런데 좀 더 난해한 부분은 성경이 죄 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죄성을 지닌 것들입니다. 성경이 어떤 특정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일반적인 원리를 적용시켜야 합니다.

첫 번째로 성경에서 참조할 만한 구절이 없을 때는 옳지 않은 행동을 정의내리려 하지 말고 절대적으로 옳은 행동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 (골로새서 4:5)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몇 안 되는 날들은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 짧고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결코 이기적인 일로 낭비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선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에베소서 4:29)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진심으로 어떤 일을 두고 하나님께서 축복하고 사용하시라고 구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으로 죄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던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지 약간이라도 의심이 간다면 그 일을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로마서 14:23).

우리의 몸과 마음은 이미 구원 받아서 하나님께 속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일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19,20). 이 거대한 진리는 내가 무엇을 하던지 어디를 가던지 간에 증명되야 할 진리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판단할 때 하나님뿐 아니라 가족, 친구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일이 개인적으로 상처를 주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해가 되고 나쁜 영향을 미친다면 옳지 않은 것입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로마서 14:21; 15:1).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이시고 구원자 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예수님보다 앞세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습관이나 오락, 야망도 나의 삶을 주관하지 못합니다. 모든 일 가운데 오직 예수님만이 권위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고린도전서 6:12).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로새서 3:17).

기독인의 삶을 살면서 어떻게 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질문: 기독인의 삶을 살면서 어떻게 죄를 극복할 수 있을까?

대답:
성경은 인간의 죄성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들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죄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죄를 이기는 것은 우리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는 점차 죄를 극복하고 그리스도와 비슷한 모습을 갖출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죄를 극복하기 위한 첫번째 수단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를 갈라디아서 5:16-25에서 대조하십니다. 이 구절에 보면 우리는 영 안에서 걷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즉 모든 신자들은 이미 성령을 소유하였지만 또한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잘 따라가야 합니다. 이는 육체를 따르기보다는 우리 생활 가운데 성령의 감동에 따르기 위한 선택을 말합니다.

성령이 한 신자의 삶 가운데 가져오는 변화는 베드로의 삶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하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하였고, 그 후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겠다 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해진 후 오순절 날 유대인들 앞에서 당당히 선포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감추거나 억제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데살로니가전서 5:19에서 말한대로)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구할 때 (에베소서 5:18-21)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해집니까? 무엇보다도 구약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의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을 완성하시기 위해 개인을 선택하시고 선택받은 그 사람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창세기 41:38; 출애굽기 31:3; 민수기 24:2; 사무엘상 10:10 등). 에베소서 5:18-21과 골로새서 3:16에서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충만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성령으로 채우신다고 증거합니다. 이것은 두번째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유는 선한 일을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3:16-17).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잘못된 선택을 알려주고 옳은 길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며 그 길을 계속 가도록 도와줍니다. 히브리서 4:12절에서 말하듯이 말씀은 살아있고 강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파고 들어가 죄에 대한 문제를 극복시킵니다. 시편 저자는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힘에 대해 시편 119에서 말합니다. 또 여호수와는 그의 대적을 이기는 (현재 우리의 영적 전쟁에 대한 비유) 성공의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낮과 밤으로 암송하여 말씀을 행하는 것이라고 배우게 됩니다. 그는 대적과의 싸움에 임하지 않을 때에도 이를 준행하였고, 이는 또한 약속된 땅을 위한 전쟁에 승리를 가져다 준 열쇠였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소홀히 여기기 쉬운 수단이자 자원 입니다. 우리는 대개 성경을 가지고 교회에 가거나 오늘의 성경말씀을 보거나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우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삶에 적용하지 않고, 드러내는 죄를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로 인하여 주를 찬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만 보면 식욕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먹을 것을 찾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주일 예배 때 일주일에 필요한 모든 영적 양식을 섭취하거나 (사실 건강한 신자가 되기 위해 결코 소화시키지도 않습니다) 혹은 말씀을 받아 먹기는 하나 그것을 묵상하여 충분한 영적 영양분을 얻지 못합니다.

만약 매일마다 성경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했다면 그리고 성령이 당신 마음에 감동 주시는 말씀을 암기하는 습관에 베이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그런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짧은 감상문을 만드시길 권합니다. 말씀을 통해 얻은 것들은 적기 전에는 말씀을 떠나지 않는 습관을 들이세요. 하나님께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신 부분에 대한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기록하세요. 성경은 성령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며 (에베소서 6:17), 영적전쟁에 임하는 데 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전신갑주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에베소서 6:12-18).

세번째 수단은 기도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다른 근본적인 자원입니다. 이것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입술로만 사용하고 실제로 거의 사용하지 않는 자원입니다. 우리는 기도 모임 과 기도 시간등이 있습니다만 초기 교회처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 3:1; 4:31; 6:4; 13:1-3 등). 바울은 그가 사역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했는지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관한 아주 엄청난 약속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7:7-11; 누가복음 6:23-27; 요한일서 5:14-15). 바울은 또 영적 전쟁을 준비하는 그의 구절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얘기합니다 (에베소서 6:18)!

죄를 극복하는데 있어 우리삶 가운데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냐구요?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에 게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봅시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셨고 베드로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깨우시고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41). 당신도 베드로처럼 옳은 것을 하고 싶어하나 몸이 따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구하라 찾으라 그리고 두드리라 라고 하신 예수님의 훈계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필요한 힘을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7:7). 기도는 마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한계와 하나님의 지칠 줄 모르는 능력을 인정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14-15).

네번째 수단은 교회, 즉 믿는자들과의 친교 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보내실 때 두 명씩 보내셨습니다 (마태복음 10:1). 사도행전에 있는 선교 여행을 보면 한 사람씩 가지 않고 둘 이상의 단체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이들의 습관처럼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데 함께 시간을 보내라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24-25). 또 서로 죄를 고백하라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5:16). 지혜로운 말씀의 구약에서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도 그 친구를 빛나게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잠언 27:17). 다수는 단수보다 힘이 있습니다 (전도서 4:11-12).

몇몇 크리스챤들은 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위해서는 책임있는 파트너를 가지는 것이 엄청난 이득이라는 것을 알아냅니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기도하고, 용기를 복돋아 주고, 꾸짖어 주는 사람을 갖게 된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입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흔한일 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 책임있는 파트너 혹은 집단을 가지면 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용기와 자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죄에대한 승리가 빠르게 다가옵니다. 또 어떤 때는 느리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자원들을 사용할 때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 약속하신 말씀에 신실하신 분임을 알기에 죄를 극복하기위해 노력하는 것을 견딜수 있는 것입니다.

일곱 가지의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는 무엇인가?



질문: 일곱 가지의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는 무엇인가?

대답: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는 본래 초대 그리스도인의 가르침으로 타락한 인간의 죄에 대한 본성을 교육하고 지시하기 위한 지침이였습니다. 이 리스트에 대한 오해는 이것들이 하나님이 용서할 수 없는 죄들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용서할 수 없는 유일한 죄는 계속된 불신이고, 이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통한 속죄함-을 거절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이 일곱 가지의 죄는 성경적입니까? 답은 그럴 수 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6:16-19에 보면,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1) 교만한 눈과 (2) 거짓된 혀와 (3)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4)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5)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6)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7)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그 일곱 가지의 죄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곱 가지의 죄를 교만, 시기, 탐식, 색욕, 분노, 탐욕, 그리고 게으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도 분명히 죄이지만 잠언 성경 구절에서 말하는 죄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치명적 일곱 가지의 죄 목록은 다른 많은 죄들을 잘 분류합니다. 거의 다른 모든 죄는 이 일곱 가지의 분류 아래 놓여집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일곱 가지의 죄가 다른 죄들 보다 더 사악한 치명적인 것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의 끝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23).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가 이 일곱 가지의 치명적인 죄악들도 포함해서 모두 용서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28; 사도행전 10:43; 에베소서 1:7).

모든 죄가 하나님께 동일할까?



질문: 모든 죄가 하나님께 동일할까?

대답:
마태복음 5:21-28에 보면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만 먹어도 형제를 살인한 것과 같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이 깨닫기 원하셨던 것은 어떤 악한 행동을 생각하거나 하고 싶다고 원하는 것도 여전히 죄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은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이상 생각하는 것 자체는 괜찮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깨닫기 원하셨던 것은 하나님은 행위와 마음 모두를 판단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행동은 마음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34).

그래서 예수님은 음욕과 간음 모두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가 동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사람을 살인하는 것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한 것입니다. 이 둘 모두 하나님의 눈에는 죄악된 것이지만 말입니다. 죄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죄는 다른 죄보다 더 죄악됩니다. 그런데 영원한 운명과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모든 죄는 동일한 비중을 지닙니다. 모든 죄는 영원한 저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23). 아무리 작은 죄라도 모든 죄는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러므로 무한하고 영원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아무리 큰 죄라도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하는 죄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이 모든 죄 값을 갚기 위함이셨습니다 (요한일서 2:2).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21). 자 그럼 모든 죄가 하나님께 동일합니까? 정답은 네와 아니오 둘 다입니다. 즉 죄의 정도를 보자면 모든 죄가 하나님께 동일합니다. 죄의 결과를 볼 때 각 죄마다 해당하는 벌은 모두 틀립니다. 그런데 용서의 정도는 모든 죄를 동일하게 만듭니다.

포르노그라피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포르노그라피를 보는 것은 죄인가?



질문: 포르노그라피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포르노그라피를 보는 것은 죄인가?

대답:
지금까지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용어가 포르노그라피라고 합니다. 포르노그라피는 오늘날 정말 만연합니다. 아마 어떤 다른 것보다 사탄은 성을 왜곡하는데 가장 성공해 온 것 같습니다. 사탄은 좋고 옳은 것을 (남편과 아내의 사랑 관계에서 이루어진 성관계) 색욕, 포르노그라피, 간음, 강간, 그리고 동성연애로 대체시켰습니다. 포르노그라피는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죄악과 비도덕으로 급속도로 빠져 들어가게 하는 첫 발자국입니다 (로마서 6:19). 마치 마약 사용자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하고 많은 양의 마약을 소비하려고 끌리는 것처럼 포르노그라피도 사람들을 더욱 강한 성중독과 거룩하지 않은 욕망으로 끌고 내려갑니다.

죄의 세가지 주요 분야는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요한일서 2:16). 포르노그라피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육체의 정욕을 일으키고, 너무나도 자명한 안목의 정욕입니다. 포르노그라피는 빌립보서 4:8에서 권하는 바에 해당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포르노그라피는 중독성이 강하고 (고린도전서 6:12; 베드로후서 2:19), 파괴로 이끌며 (잠언 6:25-28; 에스겔 20:30; 에베소서 4:19), 그리고 더욱 더 심해지는 악으로 빠지게 만듭니다 (로마서 6:19). 다른 사람의 육체를 탐하는 정욕으로 마음이 가득한 것 (포르노그라피의 본질)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마태복음 5:28). 포르노그라피에 중독되었다는 것은 아직 그 사람이 구원 받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고린도전서 6:9).

포르노그라피를 보시는 분이라면, 하나님께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포르노 그라피를 보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고 싶으신가요? 여기에 그 승리에 이르는 몇 단계를 소개하겠습니다. (1) 먼저 당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십시오 (요한일서 1:9). (2)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을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고 또 변화시키시라고 구하세요 (로마서 12:2). (3) 당신의 마음이 빌립보서 4:8로 채워지기를 구하세요. (4) 당신의 몸이 거룩함에 잠기는 길들을 배우세요 (데살로니가전서 4:3-4). (5) 성을 왜곡시키지 말고 성의 옳은 의미를 알고 당신의 배우자에게서만 당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도록 하세요 (고린도전서 7:1-5). (6) 당신이 성령 안에서 행하면 육체의 정욕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 깨달으세요 (갈라디아서 5:16). (7) 그래픽 이미지에 대한 노출을 감소시킬만한 실제적인 방법을 실천하세요 포르노그라피 방지 시스템 설치, 텔레비전과 비디오 시청 제한, 당신을 위해 기도해주거나 상담할 만한 다른 그리스도인 찾으세요.

그리스도인들의 흡연에 대한 태도는? 담배 피는 것은 죄인가?



질문: 그리스도인들의 흡연에 대한 태도는? 담배 피는 것은 죄인가?

대답:
성경은 흡연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흡연과 관련되서 적용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은 우리의 몸이 어떤 것에도 지배받지 않도록 하라고 명합니다. 고린도전서 6:12 말하길,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흡연은 거부할 수 없으리만큼 사람을 강하게 중독시킵시다. 고린도전서 같은 단락 후반부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 흡연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건강에 해로운 것입니다. 흡연은 폐 기관과 심장에 자주 손상을 입힌다고 밝혀져 왔습니다.

이렇게 볼 때 흡연은 유익한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6:12) 흡연으로 당신의 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6:20)? 어떤 한 사람이 흡연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0:31)?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흡연은 죄라고 믿고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흡연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견해를 반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건강에 해로운 음식을 먹는다고 지적합니다. 해로운 음식도 중독하게 만들며 담배만큼 몸에 해롭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카페인에 중독되어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않고는 하루를 시작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어찌하여 이 사실이 흡연 행위를 정당화 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탐식과 해로운 음식 섭취를 삼가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어떤 한 가지 죄는 비판하고 다른 죄는 허락하기 때문데 위선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찌 이를 구실삼아 흡연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유명한 영국 설교자 찰스 스펄전 같은 많은 경건한 자들이 흡연자였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담배를 폈던 스펄전이 옳지 않다는 것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흡연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스펄전은 거룩한 남자이자 훌륭한 성경 교사였습니까? 절대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럼 훌륭한 성경 교사였다는 사실이 스펄전의 다른 모든 행동과 습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흡연하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모든 흡연가들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가운데서도 흡연자가 있습니다. 흡연 자체가 사람의 구원을 막지 못하고 또 구원을 무효화시키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흡연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는 데 있어 다른 죄보다 더 가볍게 다룰 만한 것은 아닙니다 (요한일서 1:9). 흡연은 당연히 버려져야 할 죄이며 또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복해야 할 죄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성경은 문신/ 바디피어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질문: 성경은 문신/ 바디피어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대답:
구약의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명합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 19:28). 그러므로 오늘날의 신자들은 구약의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은 (로마서 10:4; 갈라디아서 3:23-25; 에베소서 2:15), 문신을 금지하는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합니다. 신약은 그리스도인들이 문신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문신과 바디 피어싱에 관해 우리가 점검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양심적으로 하나님께 솔직하게 축복해 달라고 구할 수 있는지 또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에 사용하시라고 구할 수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성경은 문신이나 바디 피어싱을 금하는 명을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믿을 만한 이유도 주지 않습니다.

또 고려할 사항은 단정함입니다. 성경은 옷을 단정하게 차릴 것을 지적합니다 (디모데전서 2:9). 단정하게 옷을 입었는지 알아보려면 옷으로 가려야 될 몸을 적절히 가렸는지 확인해 보면 됩니다. 사실 단정함의 근본적인 뜻은 당신의 주의를 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옷을 적절히 입은 사람들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습니다. 문신과 바디 피어싱은 대부분 사람의 주의를 끕니다. 이런 면에서 문신과 바디 피어싱은 단정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성경적 원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 의심의 여지가 있다면 연루되지 않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4:23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은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은 구속되었고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6:19-20에 문신이나 바디 피어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의를 줍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하고 어디를 가던지 이 진리는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면, 문신이나 바이 피어싱으로 우리 몸을 치장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허락”이 있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도박은 죄인가? 성경은 도박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질문: 도박은 죄인가? 성경은 도박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대답:
성경은 도박, 내기, 복권을 특별히 죄로 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6:10; 히브리서 13:5). 또 일확천금으로 부자가 될 생각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잠언 13:11; 23:5; 전도서 5:10). 도박은 대부분이 돈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약속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도박의 잘못된 점은 무엇일까? 도박은 다루기 힘든 화제입니다. 가끔 지나치지 않게 하는 도박은 돈을 낭비하는 것 이지만 악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거나, 불필요하게 비싼 음식을 먹을 경우나, 살 필요가 없는 물건을 구입하곤 합니다. 도박은 그러한 일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도박의 행위를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돈은 낭비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잉여로 남은 돈은 미래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저축되어야 하지 도박으로 없애면 안됩니다.

성경은 도박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운”이나 “기회”라는 단어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예를들어 레위기 에서는 추첨을 통해 재물로 드릴 양과 속죄양을 골랐습니다. 여호수아는 추첨을 통해 다양한 부족에게 땅을 할당 하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느혜미야는 추첨을 통해 예루살렘 성 안에 살 사람들을 결정했습니다. 제자들은 추첨을 통해 유다의 후계자를 결정했습니다. 잠언 16:33은 말합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성경은 카지노나 복권에 대해 뭐라고 말하려 했을까요? 카지노는 도박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돈을 벌어내는 시장입니다. 그들은 가끔 값싼 술이나 공짜로 술을 제공합니다. 그로 인해 술에 취하게 되고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카지노 안의 모든 것은 큰 돈을 가져가고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습니다. 공허한 즐거움만 빼고 말입니다. 빠른 시간내로 부자가 되는 것은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유혹이 됩니다. 미소한 확률을 쫓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삶을 파멸로 이끕니다.

복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복권이나 도박으로 얻은 이익으로 교회나 다른 선한 일에 쓰겠다고 합니다. 동기는 좋으나, 도박에서 딴 돈으로 신성한 목적에 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조사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복권 당첨자들의 경제 사정이 당첨된 후가 당첨 전보다 훨씬 나쁘다고 합니다. 설령 경제사정이 좋아진 사람도 선한 일에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돈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잠언 13:11은 말합니다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하나님은 정직한 방법을 통해 교회의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약물이나 은행절도로 얻은 돈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취하시겠습니까? 빈곤한 자가 부자가 되려는 욕심으로 훔친 돈은 필요하지도 않으시고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6:10 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또 히브리서 13:5은 말합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또 마태복음 6:24은 말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성경, 음주, 크리스챤? 술을 마시는 것은 죄가 되는가?



질문: 술이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 하는가? 크리스챤이 음주하는 것은 죄가 되는가?

대답:
몇가지 성경 구절들은 음주를 멀리하라고 권고 합니다 (레위기 10:9; 민수기 6:3; 신명기 14:26; 29:6; 사사기 13:4,7,14; 잠언 20:1; 31:4,6; 이사야 5:11,22; 24:9; 28:7; 29:9; 56:12;).하지만 이 말씀은 크리스챤에게서 맥주, 포도주, 그 밖의 알코올을 함유한 음료들을 완전히 금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성경 구절은 술에 대해 긍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전도서 9:7은 말합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찌어다.” 시편 104:14-15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아모스 9:14은 자신의 포도원에서 마시는 와인은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55:1은 “…포도주와 젖을 사라…” 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크리스챤에게 피하라 하신것은 술에 취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8). 성경은 술취함과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들을 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잠언 23:29-35). 또한 어떤 것도 자신의 육체를 다스리게 허락하지 말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6:12; 베드로후서 2:19). 술을 과하게 마시는 것은 습관이 되기도 합니다. 나아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그들의 양심을 거슬려서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어떤 행동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8:9-13). 이런 원리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음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는 심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

예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경우에 따라 포도주를 즐기셨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2:1-11; 마태복음 26:29). 신약성경의 시대에는 물이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처럼 정화시설이 없었기에, 물에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이물질들이 가득 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제 3세계국가의 물처럼 말입니다. 그 결과, 물보다 오염이 덜 된 포도주 (혹은 포도주스)를 마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디모데전서 5:23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을 그만 마시고 포도주를 마시라고 지도하고 있습니다. (물이 디모데에게 위장 문제를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어로 와인은 그저 평범한 포도주를 가리킵니다. 그 당시 와인은 적당히 발효된 것이지, 오늘날의 알코올을 함량할 정도는 아닙니다. 포도 주스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오늘날의 포도주와 같은 농도라고도 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맥주, 와인이나 그 밖의 알코올을 함량한 음료를 마시면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알코올 그 자체는 죄로 오염된 것이 아닙니다. 술에 취하는 것이나 알코올에 중독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절대적으로 삼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8; 고린도전서 6:12).

작은량의 알코올 섭취는 해롭거나 중독성이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의사들은 적은 양의 레드와인을 섭취하는 것은 건강, 특히 심장에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알코올을 조금만 섭취하는 것은 크리스챤의 자유입니다. 취하거나 중독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알코올의 영향, 알코올 과다 섭취의 유혹,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피해등을 볼때 크리스챤으로써는 음주를 삼가하는 것이 좋습니다.

동성연애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동성연애는 죄인가?



질문: 동성연애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동성연애는 죄인가?

대답:
성경은 동성연애는 죄라고 일관되게 말합니다 (창세기 19:1-13; 레위기 18:22; 로마서 1:26-27; 고린도전서 6:9). 로마서 1:26-27에서 동성연애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불순종한 결과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죄와 불신가운데 계속 머물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더 악하고 부패된 죄에 넘긴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무익하고 절망적인지 알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9은 말하길 동성연애를 범하는 자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을 특별히 따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말하길 죄 때문에 동성애자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1:24-27).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동성연애의 죄는 사람이 선택한 것입니다. 천성적으로 폭력적인 사람이 있듯이 어떤 사람은 동성연애에 대해 더 특별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욕망에 자신을 넘김으로 죄를 짓겠다는 것은 타당한 핑계가 되지 못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천성적으로 잘 분노하고 격노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동성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동성연애가 다른 죄보다 더 큰 죄라고는 다루지 않습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께 무례한 것입니다. 동성연애는 고린도전서 6:9-10에 나열된 많은 죄들 중에 하나입니다. 이 모든 죄가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간음한 자, 우상숭배자, 살인자, 절도범을 모두 용서하듯이 동성연애자도 용서하십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동성연애의 죄를 포함한 모든 죄를 이길 힘을 약속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11; 고린도후서 5:17; 빌립보서 4:13).

자위행위, 그것은 성경에 따르면 죄인가?



질문: 자위행위, 그것은 성경에 따르면 죄인가?

대답:
성경은 자위행위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또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자위행위에 관한 오난의 이야기를 다룬 성경 구절은 창세기 38:9-10 에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씨를 바닥에 뿌리는 것은 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것에 대해 명확이 말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난이 음행을 했다고 해서 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형제의 상속을 위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자위행위에 대한 것이 아닌 가족의 의무를 다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두번째 구절은 자위행위가 죄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자주 쓰여진 구절로 마태복음 5:27-30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호색된 생각을 반대하셨고 말씀하시기를 “너의 오른손이 죄를 범하는 이유라면 잘라내어 버리라” 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정확히 자위행위가 죄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위행위를 하게 되는 데까지의 행동 자체가 죄이므로 질문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위행위는 호생된 생각, 성적 자극, 도색된 생각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버려지고 극복 된다면 자위행위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위행위에 대해 괴로움을 느낍니다.

몇가지 성경 구절은 자위행위에 관한 거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에베소서 5:3은 말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자위행위가 이 시험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의심이 간다면 포기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로마서 14:23). 나아가 우리의 몸과 영혼이 모두 구속되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19, 20). 이 진리는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하고 어디를 가던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원칙들을 볼 때, 자위행위는 성경에 근거해 확실히 죄입니다. 즉 자위행위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고, 부도덕의 모양이라도 피하라는 말씀에 거슬리고, 그리고 우리 몸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 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