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대한 질문


삼위일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질문: 삼위일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대답: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이 가장 난해한 것은 그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어떤 사람도 온전히 이해하여 설명하기에 불가능합니다. 인간보다 훨씬 무한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늘의 아버지도 하나님, 예수님도 하나님, 성령님도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하나님은 단 한 분이시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내의 서로 다른 세 인격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삼위일체가 진실이 아니라거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가 성경에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두세요. 이 용어는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 세 분이 공존하시고, 함께 영원한 존재로서 한 분의 하나님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서술할 때 쓰였습니다. 기억해야 될 것은 세 명의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삼위일체는 유일한 하나님이 세 인격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지만, 이 용어 사용은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원히 공존하시는 세 인격체로 구성된 한 분의 하나님”보다 “삼위일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니까요. 이것이 문제가 된다면, 할아버지라는 단어도 성경에 쓰이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할아버지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압니다. 아브라함은 야곱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로 표현된 개념이 성경에 나와 있느냐 아니냐 입니다. 그럼 몇 성경 구절을 살펴 보면서 이 문제를 풀어 나가 봅니다.

1. 오직 단 한 분의 하나님이 존재합니다 (신명기 6:4; 고린도전서 8:4; 갈라디아서 3:20; 디모데전서 2:5).

2. 삼위일체는 세 인격으로 구성됩니다 (창세기 1:1, 26; 3:22; 11:7; 이사야 6:8; 48:16; 61:1; 마태복음 3:16-17; 28:19; 고린도후서 13:14). 구약의 구절에 있는 히브리어를 이해하면 도움이 됩니다. 창세기 1:1에는 복수 명사 “엘로힘”이 쓰였습니다. 창세기 1:26; 3:22; 11:7그리고 이사야 6:8에는 복수 “우리”가 사용되었습니다. “엘로힘”과 “우리”는 의심할 것도 없이 둘 이상을 가르킵니다. 영어는 오직 두 가지 형태, 단수와 복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쌍은 2개 만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는 세 형태가 있습니다. 즉 단수, 쌍, 그리고 복수입니다. 히브리어의 쌍은 눈, 귀, 그리고 손과 같이 쌍을 가진 것에만 사용되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엘로힘”과 “우리”라는 단어는 복수로서 둘 보다 많은 즉 셋 이상이 되어져야 합니다 (천부, 아들, 성령).

이사야 48:16 과 61:1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언급합니다. 이사야 61:1을 누가복음 4:14-19과 비교하여 보세요. 마태복음 3:16-17은 예수의 세례 사건을 서술합니다. 여기서 보여지는 것은 천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기뻐하신다고 할 때, 성령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9 와 고린도후서 13:14은 삼위일체 가운데 구별되는 세 인격체를 말하는 예가 됩니다.

3. 또 다른 많은 구절들도 삼위일체의 세 인격을 구별합니다. 구약에서 “주 (LORD)” 는 “주 (Lord)” 와 구별됩니다 (창세기 19:24; 호세아 1:4). 전자의 주는 “아들”을 소유합니다 (시편 2:7, 12; 잠언 30:2-4). 영도 또한 “주 (LORD, 민수기 27:18)” 와 “하나님 (God, 시편 51: 10-12)” 으로부터 구별됩니다. 성자 예수님도 천부 아버지 (시편45:6-7; 히브리서 1:8-9)와 구별됩니다. 신약 요한복음 14:16-17에서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하나님 아버지를 따로 언급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나 성령님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따로 언급한 또 다른 구절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자신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삼위일체 가운데 계시는 다른 인격체-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하셨습니다.

4. 삼위일체의 각 인격체는 하나님 되십니다 (요한복음 6:27; 로마서 1:7; 베드로전서 1:2). 아들도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1, 14; 로마서 9:5; 골로새서 2:9; 히브리서 1:8; 요한일서 5:20).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5:3-4; 고린도전서 3:16).

5. 삼위일체 내 상호 종속, 의존: 성경에서 보여지듯이 성령은 아버지께 속하고, 그리고 아들도 아버지께 속합니다. 이 삼위일체 내의 관계는 각 인격의 독립된 신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우리의 유한한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입니다. 아들에 관해서는 누가복음 22:42; 요한복음 5;36; 20:21; 요한일서 4:14, 그리고 성령에 관하여는 요한복음 14:16; 14:26; 15:26; 16:7 그리고 특히 요한복음 16:13-14을 보세요.

6. 삼위일체 각 인격체의 역할: 하나님 아버지는 이하 열거한 일들의 궁극적인 자원 혹은 원천이 되십니다. 가) 우주 (고린도전서 8:6; 요한계시록 4:11); 나) 계시 (요한계시록 1:1); 3) 구원 (요한복음 3:16-17); 4) 예수의 인간으로서의 과업 (요한복음 5:17; 14:10).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개시하셨습니다.

아들을 통하여서는 이런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가) 천지 창조와 우주 경영 (고린도전서 8:6; 요한복음1:3; 골로새서 1:16-17). 나) 계시 (요한복음 1:1, 16:12-15; 마태복음 11:27; 요한계시록 1:1). 다) 구원 (고린도후서 5:19; 마태복음 1:21; 요한복음 4:42). 아버지는 이 모든 일들을 그의 매개체로 일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또 성령을 통하여는 이런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가) 천지창조와 우주 경영 (창세기 1:2; 욥 26:13; 시편 104:30). 나) 계시 (요한복음 16:12-15; 에베소서 3:5; 베드로후서 1:21). 다) 구원 (요한복음 3:6; 디도서 3:5; 베드로전서 1:2). 라) 예수님의 업적 (이사야 61:1; 사도행전 10:38). 이렇게 아버지께서 이 모든 일들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해내셨습니다.

사실 어떤 뛰어난 묘사도 삼위일체를 적당히 표현해 내기 힘듭니다. 달걀을 예로 들자면, 달걀 껍질, 흰자, 노란자는 달걀의 부분들이지 달걀 그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단지 하나님의 한 부분들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가 되십니다. 또 물로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설득력이 있지만, 그래도 삼위일체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물, 증기, 얼음은 물의 다른 형체일 뿐이지만,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하나님의 단지 다른 형체가 아니라, 각각 하나님 그 자체가 되십니다. 이 모든 비유가 삼위일체의 모양을 보여줄 수 있지만, 전적으로 합당하지는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유한한 비유로 온전히 묘사될 수 있겠습니까? 삼위일체에 초점을 두는 것 대신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한하게 높으신 사실에 초점을 두도록 합니다.” (로마서 11:33-34)

하나님은 존재하십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질문: 하나님은 존재하십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대답: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되거나 반증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이처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그냥 간단히 온 세상에 나타나셔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믿음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9).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편 19:1-4). 별들을 볼 때, 우주의 거대함을 헤아릴 때, 자연의 경이로움을 관찰할 때, 일출의 아름다움을 볼 때, 이 모든 것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이런 것들로 불충분하다면 우리 마음이 또 증거합니다. 전도서 3:11에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 존재 깊은 곳에는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을 초월하는 존재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인식을 무시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해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여전히 부인할 사람들에게 성경은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시편 14:1). 역사가운데, 모든 문화와 문명가운데, 모든 대륙에서 신적인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이 믿음을 생기게 한 무엇인가가 혹은 어떤 인격체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경의 증거 외에 논리적으로도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논할 수 있습니다. 첫째, 존재론적 논쟁.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비길 데 없이 가장 큰 자”로 정의함으로 논리를 펼칩니다. 일단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큽니다. 고로 인식할 수 있는 가장 큰 존재는 논리적으로 반드시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인식할 수 있는 가장 큰 존재가 될 수 없고 이는 초기에 설정해 논 정의에 모순됩니다.

둘째, 목적론 논쟁. 즉 이토록 놀랍도록 설계된 우주는 그 배후에 반드시 이런 디자인을 고안해 낸 신적인 존재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몇 백마일 가깝거나 멀기만 하여도 지금처럼 많은 생물들이 이 지구상에 생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대기상의 요소들의 구성 비율이 조금만 달라졌다 하더라도 지구상의 많은 생물들이 죽었을 겁니다. 또 단 한 개의 단백질 분자가 우연히 형성될 가능성은10243 분의 1인데, 단세포는 한 개가 아닌 수 백만 개의 단백질 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 우주론적인 논쟁입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결과물입니다. 이 결과물들을 일으킨 원인이 분명히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생성하기 위해 결국 생성되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해야 합니다. 이렇게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해서 생성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넷째, 도덕적 논쟁입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는 일정 형식의 법을 지니고 있고 사람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살인, 거짓말, 약탈, 부도덕 이것들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거부합니다. 이렇게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어디서 파생된 것이겠습니까?

이 모든 논쟁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하기를 사람들은 이 분명하고도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고 거짓을 믿을 것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1:25은 말합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 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성경은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핑계 댈 수 없다 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로마서 1:20).

몇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증거가 없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실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면 하나님 앞에 떳떳하지 못한 일들이 드러나고 용서를 필요로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23; 6:23).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판단하실지 걱정할 필요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화론을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선택사항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사실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반증하려는 그 시도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기독교인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매일 그 분께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지만, 그의 존재를 감지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느끼고, 그 분의 사랑을 압니다. 그리고 그 분께 은혜를 구합니다. 내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놀랍게 나를 구원하셨고 내 삶을 변화시키셨기에 그 분의 존재를 인식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논쟁들 자체는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거부하는 자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존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니까요 (히브리서 11:6).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캄캄한 곳의 희미한 사다리가 아니라, 그 분의 존재를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환하게 불이 켜진 방을 향하는 안전한 계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제적 존재인가? 하나님이 실제로 게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질문: 하나님은 실제적 존재인가? 하나님이 실제로 게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대답:
하나님은 자신을 세가지 면에서 드러내셨습니다. 창조물을 통하여, 그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증거는 그가 만드신 것들을 통해서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로마서 1:20).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다내는도다” (시편 19:1).

만약 내가 들판에서 손목시계를 하나 주웠다면, 그것이 갑자기 만들어졌다거나 원래 그 곳에 계속 있어 왔다고 가정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시계의 디자인을 보고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위에서 더 훌륭하고 정밀한 디자인을 보게 됩니다.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시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걸작품인 지구의 일정한 자전에 있습니다 (또한 세슘-133 원자의 방사능 성질에도 있습니다). 우주는 훌륭한 디자인을 전시해 보이고 이는 또한 훌륭한 디자이너를 증거합니다.

당신이 암호문으로 된 메시지를 발견했다면 그 암호를 해독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암호를 생성해낸 높은 지능을 갖춘 사람이 분명히 있다고 가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의 각 세포 안의 DNA 체계는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럼 그 DNA의 복잡성과 용도를 구성한 자는 누구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복잡하지만 잘 조화된 세상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또한 각 사람의 마음에 영원한 것을 인식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전도서 3:11).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들과 지구를 초월하는 것들을 지각하는 타고난 능력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최소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배입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문명은 일정한 도덕적 법규를 가치있게 여겨왔습니다. 놀랍게도 문화들간의 비슷한 점이 많을 정도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개념은 전세계적으로 높임을 받는 반면 거짓은 질타를 받습니다. 이 공통적인 도덕성, 즉 옳고 그름에 대한 지구상의 이해는 이런 양심의 가책을 부여한 가장 높은 도덕적 존재를 주목하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사람들은 문화를 막론하고 예배의 문화를 형성해왔습니다. 숭배의 대상은 다양하나 인간보다 높은 어떤 힘의 존재를 숭배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예배하고자 하는 성향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형상을 반영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7).

하나님은 또한 그분의 말씀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자명한 사실로 다룹니다 (창세기 1:1; 출애굽기 3:14). 누구나 자서전을 쓰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 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그의 책에서 자신을 증명하려고 시간 낭비하시지 않습니다. 삶을 변화시키고 무결하고 기적을 불러오는 성경책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살펴보게끔 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십니다 (요한복음 14:6-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 14).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십니다” (골로새서 2:9).

예수님의 생애 동안 그는 구약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고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7). 그는 자신의 신성과 그의 말씀이 참된 것임을 확증해 주시려고 수많은 긍휼과 공공연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요한복음 21:24-25). 그리고 그의 십자가형을 당한 삼일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수 백명의 사람이 이를 목격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6). 예수를 증거하는 역사적 기록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사도행전 26:26).

하나님에 대해 자신들만의 이해와 증거를 가지고 의심하는 자들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 증거도 대지 못하는 자들도 만날 겁니다 (시편 14:1). 그러나 결국 모든 자가 믿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질문: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대답: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말 해 줍니다. 성경의 권위 없이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려 한다면 그것은 정확하지 않은 사람의 생각보다 못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이해하는데에 있어서 말입니다 (욥기 42:7).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려는 시도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어긋난 이해는 거짓 신들을 세우고 따르고 숭배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3-5).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부분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혹은 본질 중에 하나는 “빛” 입니다. 이는 자신에 대한 정보를 스스로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60:19, 야고보서 1:17).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그 분 자신에 대한 지식은 등한시 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1). 창조론, 성경, 그리고 육신이 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은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 분의 창조물의 한 부분이며 (창세기 1:1; 시편 24:1),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이해하는데서 시작 합시다. 사람은 다른 많은 창조물보다 높고 창조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창세기 1:26-28). 그 후 창조물은 인간의 타락에 의해 손상되었습니다만 여전히 하나님의 작품임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3:17-18; 로마서 1:19-20). 그 많은 피조물들의 광대함, 복잡성, 아름다움, 질서를 고려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 감 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칭하는 몇 가지 다른 이름을 이해하는 것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도록 도와줍니다.

엘로힘- 강한 자, 신적인 존재 (창세기 1:1)
아도나이- 주,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출애굽기 4:10, 13)
엘 엘리온- 가장 높은 자, 가장 강한 자 (창세기 14:20)
엘 로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강한 자 (창세기 16:13)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창세기 17:1)
엘 올람- 영원한 하나님 (이사야 40:28)
야훼-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즉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 (출애굽기 3:13, 14)

하나님은 영원이시고 그분은 시작과 끝이 없으신 언제나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영원히 멸하지 않고 무한합니다 (신명기 33:27; 시편 90:2; 디모데전서 1:17).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심 즉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말라기 3:6; 민수기 23:19; 시편 102:26, 27). 하나님은 비교 될 수 없는 분입니다. 그 분이 하신 일을 따를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벽하시고 그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무엘하 7:22;시편 86:8; 이사야 40:25; 마태복음 5:48). 그분은 신비하고, 심오하시며, 찾아낼 수 없고, 지나간 과거의 것을 찾으면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이사야 40:28; 시편 145:3; 로마서 11:33, 34).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편애로 사람을 대하지 않으십니다 (신명기 32:4; 시편 18:30).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 입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그의 행하심은 항상 그의 성품과 일치합니다 (요한계시록 19:6; 예레미야 32:17, 27). 하나님은 동시에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십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하나님이란 뜻은 아닙니다 (시편 139:7-13; 예레미야 23:23). 하나님은 전지 하십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십니다. 심지어 순간 순간 우리가 생각하는 내용까지도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기에 그의 판단은 공정 합니다 (시편 139:1-5; 잠언 5:21).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 입니다. 그 분 홀로만이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필요와 갈망을 만족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만이 우리의 숭배와 헌신의 대상되십니다 (신명기 6:4).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며, 잘못을 간과하거나 지나치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겪으셔야 했던 것입니다(출애굽기 9:27; 마태복음 27:45-46; 로마서 3:21-26).

하나님은 주권자 이십니다 즉 모든 것 위에 최고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다 합쳐도 그의 목적을 뒤엎을 수 없습니다 (시편 93:1; 95:3; 예레미야 23:20). 하나님은 영 이십니다 즉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18; 4:24). 하나님은 삼위일체 이십니다. 본질이 같고 동일한 능력과 영광을 지닌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하나 되십니다. 하나님은 진실 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본인이 청렴결백하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시편 117:2; 사무엘상 15:29).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모든 도덕적으로 패역하고 훼손된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계시고 그것들을 적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악한 것을 보시며 그것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로 참조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6:3; 하박국 1:13; 출애굽기 3:2,4,5; 히브리서 12:29). 하나님은 은혜로우십니다. 그의 은혜는 하나님의 선하심, 친절하심, 자비로우심, 그리고 사랑을 포함합니다. 은혜로우신 분이 아니셨다면 우리는 그의 다른 모든 성품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기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34:6; 시편 31:19; 베드로전서 1:3; 요한복음 3:16; 17:3).

누가 하나님을 창조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로부터 오셨을까요?



질문: 누가 하나님을 창조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로부터 오셨을까요?

대답:
무신로자들 과 회의론자들의 흔한 주장은, 만역 모든 만물이 어떤 것으로부터 기인했다면, 신도 기인한 출처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만약 신도 기인의 출처를 필요로 한다면, 신은 신이 아니다 (그리고 신이 신이 아니라면 당연히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결론합니다. 이 질문은 사실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는가?” 라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질문을 현학적으로 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무에서 유가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만약 신이 유한 존재라면 그도 기인한 출처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 질문은 궤변적입니다. 왜냐하면 신도 어디로부터인가 기인했을 텐데 그곳은 어디일까라는 그릇된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이치에 어긋납니다. 마치 “파란색은 어떤 냄새가 날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파란색은 냄새를 가진 범주에 속하지 않기에, 질문자체가 오류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피조물이나 존재하게 된 것이나 또 발생하게 된 것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된 것이 아니고, 그는 그저 존재하십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자, 우리는 무에서는 무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있었다면, 그 이후에도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무엇인가가 항상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항상 존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가?



질문: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가?

대답: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음성으로 말씀하셨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출애굽기 3:14; 여호수아 1:1; 사사기 6:18; 사무엘상 3:11; 사무엘하 2:1; 욥기 40:1; 이사야 7:3; 예레미야 1:7; 사도행전 8:26; 9:15- 소수의 예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에게 말할 능력이 없다든지 혹은 말하기 꺼려한다고 볼 만한 성경적인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수 백 차례 이상 말씀하신 기록이 인간 역사 4,000여년에 걸쳐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사용하신 것은 예외의 경우이지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건들도 그것이 청각으로 들을 수 있는 음성이었는지, 내면의 음성이었는지, 혹은 감명을 받은 것인지는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그의 말씀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디모데후서 3:16-17). 이사야 55:11을 봅시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성경은 사람들이 구원 받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후서 1:3-4을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둘째로, 감동이나 사건 그리고 생각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또 양심을 통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도록 도우십니다 (디모데전서 1:5; 베드로전서 3:16). 즉 그 분의 생각을 닮게 되기까지 일하십니다 (로마서 12:2).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 가운데 어떤 상황을 허락하셔서 우리를 지도하시고, 변화시키시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우십니다 (야고보서 1:2-5; 히브리서 12:5-11). 베드로전서 1:6-7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경우입니다. 믿기 어렵지만, 우리는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의 주장을 듣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에서조차도 이런 경우는 특별한 예외이지 일반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에게 말했다고 주장한 사람을 만난다면, 그 말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항상 비교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말씀하신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부합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상반되지 않으십니다. (디모데후서 3:16-17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무슨 뜻일까?



질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무슨 뜻일까?

대답:
사랑의 하나님은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성경이 묘사하는 사랑에 대해 보고, 하나님께서 사랑의 본질인 몇 가지 방식을 보겠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4-8a). 이것이 하나님이 묘사하신 사랑이며,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요한일서 4:8) 이 것이 그분의 본질인 것입니다.

사랑(하나님)은 자신을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나아오는 자도 그 분의 이런 사랑에 응하여 행합니다. 사랑 (하나님)은 모든 자에게 온유합니다. 사랑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고, 모든 자에게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사랑(예수님)은 남이 가진 것을 탐하지 않고, 불만 없이 낮은 삶을 사셨습니다. 사랑(예수)는 자신이 육체 가운데 거하면서 실제로 어떤 분임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이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 높은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랑 (하나님)은 복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복종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예수는 기꺼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순종했습니다. “ 오직 아버지가 명하신 대로 행함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4:31). 사랑(예수)는 항상 다른 이들의 유익을 찾으셨으며,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크게 표현한 말씀은 요한복음 3:16과 로마서 5:8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그 분의 영원한 집, 천국에서 그 분과 함께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소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심으로 이 것이 가능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로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셨습니다. 사랑은 용서를 베풉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사랑은 하나님의 특성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특징 중에 핵심적인 면, 즉, 그의 인격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거룩함, 의로움, 정의, 심지어 그의 진노하심과도 전혀 상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특성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이 정의롭고 의롭듯이,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의 완벽한 예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자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같이 사랑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2; 요한일서 3:1; 23, 24).

왜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신약성서와 너무 다른 모습일까?



질문: 왜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신약성서와 너무 다른 모습일까?

대답: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은 구약과 신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근본적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분노의 하나님, 신약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구분하는 사람도 동일한 오해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점진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그리고 역사 안에서 그 분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통해 점차적으로 자신을 나타내 오셨습니다. 이런 사실이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게 보이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을 동시에 잘 읽어나가면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분노와 사랑 모두가 구약과 신약에 두루 걸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 전반에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34:6; 민수기 14:18; 신명기 4:31; 느헤미아 9:17; 시편 86:5; 108:4; 145:8; 요엘 2:13).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더 온전히 드러난 구절들이 보입니다. 예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또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하실 때 사랑이 많은 아버지가 자녀 대하듯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 우상을 숭배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셨지만, 그들이 회개할 때 마다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신자들을 대하실 때에도 동일히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12:6은 말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비슷한 방법으로, 구약 전반을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약에서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로마서 1:18).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신약에서 보여진 모습과 특별히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한 특정한 부분에서 하나님 성품의 한 단면이 다른 면보다 더 많이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불변합니다.

성경을 진정으로 읽고 공부하기 시작한다면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동일하심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비록 개별적인 66권으로 이루어 졌고, 두 개 혹은 세 개의 대륙에서, 세 개의 언어로, 1500여년에 걸쳐, 그리고 40명 이상의 저자에 (각기 다른 모습의 삶을 살았던) 의해 기록되었지만,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 없이 잘 통합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랑과 자비와 공의의 하나님이 죄인들을 다양한 상황들을 통해 어떻게 다루시는지 얘기합니다. 사실 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편지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위한, 특히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인간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도록 호소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런 대우를 받기에 합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로우시고, 쉽게 분노하지 않으시고, 풍성한 자비와 진리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셔서 그 분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유일한 참신인 그 분을 예배하지 않고, 모든 거짓된 신과 인간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모든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임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1장)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에 의해 우리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는 심판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하시고 인간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만드셔서, 하나님의 분노를 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10절에 이 놀라운 진리가 명시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죄 사함 받는 제사제도를 설정하셨으나, 이는 오직 일시적인 효과만 지니며,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예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만이 죄에 대한 진정한 대속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에서 약속된 구세주는 신약에서 더욱 온전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그 분의 궁극적인 사랑을 표현하시고 그의 모든 영광을 보이십니다. 즉 구약과 신약 모두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5). 우리가 성경을 더 가까이 공부할수록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처럼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더 명백해진다. (야고보서 1:17)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셨을까요?



질문: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셨을까요?

대답: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악도 하나님이 창조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은 바위나 전기처럼 “사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악을 한 병 가질 수 없습니다. 즉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의 부재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구멍은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길만한 다른 존재로부터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창조된 모든 것이 좋았다고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중 한가지는 선한 것을 선택할 자유를 가진 피조물이었습니다. 진정한 선택을 가지기 위해서는 선한 것 이외에 선택할 다른 것을 허락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들이나 사람이 선한 것이나 선하지 않은 것 (악)을 선택할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두 가지 선한 것들 사이에 나쁜 관계가 존재하면 우리는 그것을 악으로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를 필요로 하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묘사를 봅시다. 제가 사람들에게 “차가운 것이 존재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답은 틀린 것입니다. 차가운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열의 부재가 차가움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둠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은 빛의 부재입니다. 악은 선한 것 부재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말한다면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단지 선한 것의 부재를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허락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악이 발생할 가능성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인간과 천사들은 하나님을 자발적 선택이 아닌 의무감에서 섬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이 원하는 것을 프로그램을 따라 수동적으로 이행할 로봇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의 가능성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아닌지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1:33-34).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행하시는지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름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사물들을 거룩하고 영원한 시각으로 보십니다. 우리는 사물들을 죄스럽고 세상적, 일시적인 관점으로 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고, 그로 인해 악, 죽음, 고통을 모든 인류에게 가져올 것을 아셨음에도 왜 그들을 이 땅에 존재하게 하셨을까요? 이 질문들은 인간인 우리에게서 적절하게 답해질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거룩하고 완벽하며 궁극적으로는 그분께 영광이 될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허락하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악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우리 의지에 의한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무감으로 인해 그분을 경배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 나쁜 일이 착한 사람들에게도 일어날까?



질문: 왜 나쁜 일이 착한 사람들에게도 일어날까?

대답:
이는 가장 어려운 신학적인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시고, 전지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전능하십니다. 그런데, 무한하지 않고, 전지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은 인간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방법들을 어떻게 완전히 이해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욥기는 이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생명을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사단이 욥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욥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가 나를 칠지라도, 소망을 그에게 두리라” (욥기 13:15).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욥기 1:21). 욥은 하나님이 왜 그런 일들을 허락하셨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도 이렇게 반응해야 합니다.

왜 나쁜 일이 선한 사람들에게도 일어날까요? 성서적인 답은 이 세상에 “선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에 의해 더럽혀지고 전염되었다고 매우 분명하게 명시해놓고 있습니다. (전도서 7:20, 로마서 6:23 요한일서 1:8). 로마서 3:10-18 는 “선한” 사람의 부재를 더 이상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지금 이 순간, 지옥으로 던져질 자격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서 보내는 매 초, 매 순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비극도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원한 지옥의 불에 비하면 자비로운 것이다.

아마도 보다 나은 질문은 “왜 나쁜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은 일어나는가?” 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이 세상 인간들의 악과 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 6:23).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요한복음 3:16; 로마서 10:9) 우리는 그 분의 용서를 받고, 천국의 처소를 약속 받습니다(로마서 8:1). 사실 우리가 받기에 마땅한 것은 지옥이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우리는 천국에서의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끔 나쁜 일들이 그런 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이해하든, 못하든 말이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은 선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사랑이시고 또한 자비로우시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기 보다는 우리의 반응은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3:5-6).